김부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뚜벅이'(많이 걸어다녀서 지역구에서 붙여준 별명) '바보' (지역주의 타파 위해 대구 출마하며 생긴 별명) 등 다양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1956년 12월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뒤늦게 출생신고를 하면서 1958년 1월 21일생이 됐다. 아버지 김영룡씨는 1955년 공군에서 3년 군복무를 했고, 1958년 공군 하사관으로 군에 정착했다. 군인 아버지를 둔 외아들로 자란 TK(대구 경북) 사람이지만, 호남에 뿌리를 둔 진보 정당에서 활약한 '경계인'이기도 하다.
소극적인 경북고 범생이
↑ 어린 시절 김부겸 전 의원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당시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지만 친구들과 선생님 권유로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2등을 하게 된다. 김 전 의원 인생의 첫 선거였다. 당시 학생회장에 당선된 사람은 양선규 대구교육대 교수이다. 김 전 의원의 경북고 인맥(56회)으로는 김두우 전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실 홍보수석비서관(김부겸 전 의원과 같이 숙식 생활) 등이 있다.
↑ 경복고 시절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1972년 10월 유신이 발생한다. 유신 정권 시절인 1975년 김 전 의원은 대학 입시에 실패해 후기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이내 재수 생활을 선택한다. 그 와중에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74년 12월~75년 7월)가 발생하자, 김 전 의원은 친구들과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 동아일보사 광고국 광고면을 사서 "언론 자유를 향한 구국의 횃불이여"라는 광고를 내기도 한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1970년대 당시 분위기는 3년 개근과 우등생을 탄 모범생 '범생이'를 '얼치기 민주투사'로 바꿨다"고 회상한다. 이어 서울대 사회대 (76학번)에 입학한다.
'긴급조치' 세대의 사자후
김 전 의원은 '긴급조치 세대' (국가 중대한 위기가 있으면 대통령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일시 정지하는 유신헌법 상 조치/ 86세대보다 앞선 운동권 세대) 막내로 대학 생활 내내 정권과 맞서 싸운다.
첫 계기는 2학년이었던 1977년에 발생한다. 학생들의 논의의 장이었던 사회학 심포지엄이 무단 취소되자, 학생들과 학교-경찰이 충돌하는 '26동 심포지엄 사건'이 발생해 서울대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다. 김 전 의원은 여기에 항의하는 '도서관 점거 시위 사건'에 참여하면서, 영등포 구치소와 서울 구치소를 거쳐 안양 교도소에서 2년 수감생활을 한다. 이 수감생활에서 동교동계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씨와 만나고, 김거성(문재인 정부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여균동(전 의원) 등과 토론하며 지낸다. 처음으로 '뺑끼통'(감옥 변소를 이르는 말)에 앉아보는데, 다양한 수감자들과 어울리며 민주주의를 꿈꾼다.
↑ 1980년 '아크로폴리스 사자후' 당시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1979년 10.26 사태부터 1980년 5.17 비상계엄까지, 민주화 요구가 들끓는 '서울의 봄'이 찾아온다. 수감 생활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온 김 전 의원은 이해찬·이신범·김병곤 등 복학생 그룹의 막내로서, 심재철 총학생회장과 유시민 대의원회 의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지도부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이때 김 전 의원의 웅변가 기질이 꽃을 피운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12,000 명 앞에서 했던 연설은 지금까지 '아크로폴리스 사자후'라는 별칭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학생들과 민주운동 세력의 '서울역 회군'으로 인해 '광주 사태'로 끝난다.
아버지의 '꺾인 꿈'과 결혼
김 전 의원은 "광주가 죽어가고 있습니다"고 적힌 유인물 제작과 살포를 맡아서 광주 실태를 알리는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곧 김 전 의원은 언론 지상에 '대구지역 행동책'으로 '미남형' 이라는 몽타주 설명과 함께 수배자로 지목된다. 여기저기 전전하며 도피하던 중, 아버지가 대구지역 합수부 (보안사령부)로 연행되고, 열흘이 되도록 석방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김 전 의원은 결국 자발적으로 계엄사로 출두하고, 안양 교도소에 다시 수감된다. 아버지는 좌천을 겪고, 몇 년만에 중령으로 예편하게 된다. 공군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데다,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이 아들의 시위 전과로 꺾인 것이다.
↑ (왼) 젊을 적 부모님과 김 전 의원 (오) 부인 이유미씨와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
수감과 학교 제적을 반복하던 김 전 의원은 민주화 운동 동료인 이영재 목사의 여동생 이유미씨를 1979년 만나게 된다. 대구 한국은행 직원이었던 이유미씨는 김 전 의원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기도 하는 등 힘든 일을 겪는다. 하지만 큰 오빠(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학생운동으로 제적되고, 셋째 오빠(이영재 목사)는 학생운동으로 옥살이를 했고, 남동생(이영우)은 미 문화원 폭파사건으로 고문을 당하는 민주화 운동 집안에서 자란 이유미씨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82년 결혼 후 1983년 서울에 정착한다.
재야 생활과 '이선실 간첩사건'
↑ (왼) 1986년 서점 주인으로 (오) 민통련 수련회 당시 (오른쪽 다섯번째는 이해찬 전 총리) [출처=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김 전 의원은 재야 생활로는 불충분하다는 갈증을 느끼고 현실 정치로 나아간다. 1991년 '꼬마' 민주당에 입당한다. 당시 노무현 대변인 밑에서 부대변인 역할을 하며 경력을 쌓아간다. 그러던 중 92년 북한 간첩 할머니가 진보 인사들에게 접근해 공작을 폈다는 '이선실 사건'이 터진다. '이선실'을 옆집 할머니로 알고 있던 김 전 의원이 잡혀간다. 다행히 간첩인 황인오와 이선실의 대화록에서 "부겸이 이놈, 키워서 혁명 전사를 만들려 했더니 도무지 협조를 안 해. 돈도 좀 주려 했더니 받지도 않고"라는 기록이 나왔다. 김 전 의원은 수상한 인물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죄'로만 유죄 판결을 받는다.
김대중·노무현 거쳐, 현실 정치로
↑ (위) 김대중 당시 총재와 농촌 순방 당시 (아래) 1992년 민주당 부대변인 당시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
당으로 돌아오자, 이미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 총재는 영국으로 떠난 상황이었다. 김 전 의원은 재판받는 와중에도 월급을 챙겨줬던 당과 김대중 총재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이어 1995년 김대중 총재의 정치 복귀로, DJ의 새정치국민회의이냐 민주당 잔류냐의 선택 기로에 서게 된다. 노무현·제정구·유인태·원혜영 등과 함께 잔류를 택한다. 영남-호남이라는 `지역주의`를 벗어나고자 했던 김 전 의원은 또다른 지역 정당의 탄생이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DJ는 아버지같은 분이었지만, 정치적 선택은 달라진 이유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
분당 이후 민주당이 더 쪼그라들자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만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동분서주한다. 특히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홍준표 변호사 집에도 찾아가는 등 인재 영입에 공을 기울이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게 된다. 또 `하로동선`이라는 식당을 열어, 정치인들이 직접 운영하며 정치자금도 벌어본다.
하지만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이 다시 분열한다. 조순 당시 서울시장 영입파(제정구·이철 등)와 DJP 연합파(노무현·유인태·원혜영 등)로 나뉜 것으로, 김 전 후보는 조순 영입을 선택한다. 이후 조순 민주당 총재 겸 대선 후보가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와 합당을 발표하고 한나라당을 출범시키면서 당적을 한나라당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통추` 모임을 계속 이어간다.
첫 당선이지만, 다시 민주당으로
↑ 2003년 한나라당 탈당 당시 [ 출처 = 연합뉴스 ] |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 이후, 열린우리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압승한다. 경기 군포에서 당선된 김 전 의원은 2005년 정세균 당시 원내대표 밑에서 부대표로서 야당과 대립과 충돌을 줄이려 백방으로 노력한다. 진보-보수를 넘나든 `대화파`로 활약하며,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통과까지 이뤄낸다.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들어온 손학규 후보의 17대 대선 민주당 경선을 돕는다. 당시 민주당 경선은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한나라당 경선만큼 흥행을 일으키지 못했던 상황이라,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김 전 의원이 손학규 후보를 적극 영입했던 것이다.
'지역주의 타파' 험지 고향 TK로
김 전 의원의 정치 인생은 `지역주의 타파`의 연속이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경기 군포에서 당선되며 3선 고지에 오른 이후, 2012년 19대 총선 때 돌연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하며 지역주의 해소의 상징이 된다. 19대 총선에서 민주당 당적을 달고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40.4%라는 놀라운 득표율을 보이지만 결국 낙선한다.
↑ 2020년 21대 총선 대구 수성갑 출마 당시 유세 현장에서 [ 출처 =연합뉴스 ] |
이후 2020년 21대 총선에서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과 맞서 패배하며 다시 고지를 내주게 된다. 2020년 8월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지만, 이낙연 대표와 만나 2등으로 석패를 하게 된다.
그를 돕는 사람들
김부겸 전 의원은 민주당에서 몇 없는 영남 출신으로, 늘 개혁파로 꼽힌다.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지만, 한나라당에 있을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할 정도로 소신이 강하다는 평가다.
↑ 과거 제정구 전 의원과 김부겸 전 의원 [ 출처 = 김부겸 전 의원측 제공] |
그 외에 대구시장에서 맞붙었던 권영진 대구시장과 영입 인재
현재 당 내에서는 학창시절부터 인연인 조정식 의원, 경북고 후배인 권칠승 의원 그리고 이광재, 고영인 의원과 가깝다.
[ 주진희 기자 / jhookiza@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