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다디’와 ‘J에게’ 탄생시킨 강변가요제의 고장
매년 10월 자라섬재즈페스티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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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궁화호 내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인물 |
나는 경상도의 어느 조그만, 인구 5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그곳은 내가 태어났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 그대로 남아 존재하고 있다. 벽돌 혹은 시멘트 담을 두른 고만고만한 집들이 낮게 서 있고 하늘은 얽히고설킨 전깃줄로 어지럽다. 별달리 눈길을 줄 만한 것도 없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럴싸한 풍경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시골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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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겨울만의 운치를 간직한 자라섬 (아래)무궁화호 앞 공중전화 |
그럴 때면 차를 몰고 가까운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간다. 마음이 내킬 때 한나절 드라이브가 가능한 인생을 만드는 데 삼십 년이 걸렸다. 일주일 정도 아무 걱정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인생을 만들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걸릴까. 아니, 그 시간이 오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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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무궁화호 내부에 전시된 타자기, 무궁화호를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
어쨌든 나는 지금 가평으로 가고 있다. 북한강이 흘러가는 곳, 그 강변에 자리 잡은 도시다. 내가 사는 파주와 정확히 대각선으로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퇴계원을 지나니 ‘춘천’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고, 학교를 다녔던 옛 직장동료들에게서 ‘경춘선의 낭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에 대해 잘 모른다. 파주에 산 지 20년이 넘었고, 가끔 이런 저런 약속이 있어 서울에 나가곤 하는데 그래봐야 합정과 홍대, 광화문이나 종로 인근 정도다.
고백하자면, 경춘선이라는 철로가 있다는 걸 신문사에서 여행기자를 시작하며 알게 됐다. 그 철로를 따라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대성리와 강촌 등으로 MT를 떠나던 청춘들로 가득 싣고 철로를 따라 달렸다는 것도 취재 여행을 다니며 알게 됐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통일호와 무궁화호가 느린 속도로 덜컹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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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역에 전시되어 있는 무궁화호 열차, 추억이 떠오르는 무궁화호 내부 |
경춘선과 함께 낭만의 상징이었던 가평역은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문을 닫았다. 기차가 더 이상 지나지 않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텅 빈 플랫폼은 금세 잡초가 우거졌다. 가평역은 서울에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던 터라 사람들이 유독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유독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일까, 가평역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고 다양한 개발 방안이 쏟아졌다. 결국 가평군은 ‘음악역1939’라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자고 의견을 모았다. 1939는 가평역이 처음으로 영업을 시작한 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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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역1939, 음악역에 있는 콘트라베이스 조형물 |
‘담다디’의 이상은이 바로 강변가요제 출신이다. 한국 가요계의 전설인 이선희도 강변가요제 출신이다. ‘J에게’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했다. 강변가요제는 이름 그대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매년 여름 북한강 강변에서 열렸는데 그 주 무대가 바로 가평이었다. 나는 파주에서 출발해 가평까지 오는 내내 이선희와 이상은, 또 그 시절을 함께 한 박미경, 티삼스, 이상우 노래를 들었다. 가끔 진눈깨비가 내렸고 와이퍼가 슥슥 차창을 닦는 동안 카세트테이프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해 친구들과 나누어 듣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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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시계계방향)음악역 내부의 스튜디오, 음악역 내부의 스튜디오, 아담한 크기의 상영관 |
최고 수준의 음악 복합문화공간
3만 7,257㎡의 넓은 부지에 400억 원이라는 큰 돈을 들여 만든 음악역1939는 단순히 폐역을 리모델링한 공간이 아니다. 공연장과 스튜디오도 마련되어 있으며, 연간 수준 높은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유명한 가수들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음악인들은 이곳이 창작과 공연을 함께 할 수 있는 세계 수준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도 그럴 것이 녹음실을 팝의 전설 ‘비틀스의 녹음실’로 유명한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 등 글로벌 유명 녹음실 300개를 만든 샘 토요시마가 설계했다. 믹스룸과 편집실 등도 갖추고 있다. 국내 아날로그 녹음 시스템으로는 최고 수준의 장비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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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약역 2층에 위치한 도서관 |
음악역1939 가까이에는 무궁화호 기관차 1대와 객차 1량(72인승)이 전시되어 있다. 문이 열려 있길래 내부로 들어가 보니, 예전에 타던 무궁화호와 똑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덜컹거리며 느리게 지나던 그때 그 시절 열차에 올라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열차 실내에는 경춘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줄 추억의 사진과 단편 시를 전시하고 있다. 교복을 입고 단체여행을 떠나던 까까머리 학생들 사진도 있고, 강변가요제의 장면을 담은 스냅컷도 있다. LP와 카세트테이프도 한편에 전시해 놓았다. 열차에 있으니 1980~90년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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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역 3층 전시장에 가면 세계적 뮤지션들이 참여한 역대 자라섬재즈 페스티벌 사진들을 볼 수 있다. |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의 DNA를 간직한 곳
가평 하면 매년 10월 열리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을 빼놓을 수 없다. 가평 자라섬에서 매년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로 현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공연이 이어진다. 작년의 경우 집시 재즈 기타의 최고점에 서 있는 비렐리 라그렌 퀄텟의 첫 내한 무대로 시작해 런던 재즈 신에서 가장 주목받으며 글래스톤베리, 프리마베라 등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에 오르고 있는 스팀다운의 열정적인 무대가 펼쳐졌다. 하이라이트는 영국 컨템포러리 재즈 신의 거장인 노마 윈스턴의 무대였다. 그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팬들과의 만남을 특유의 깊은 감성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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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경춘선 가평역을 새롭게 재탄생시킨 음악역1939 |
청평댐에서 남이섬 방향으로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다 이런 산중에 뭐가 있으려나 싶을 때쯤 빨간 지붕을 얹은 하얀 건물들이 보인다. 가평 산골짜기에 난데없이 등장한 유럽풍 건물, 쁘띠 프랑스다. 쁘띠 프랑스란 ‘작고 예쁜 프랑스’란 뜻이다. 지난 2008년 ‘꽃과 별, 그리고 어린왕자’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프랑스 남부지방 전원마을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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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생텍쥐페리의 사진 (아래)쁘띠 프랑스 건물 전경 |
꼭 둘러봐야 할 곳은 생텍쥐페리 기념관이다. 생텍쥐페리의 탄생과 성장기, 그리고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다양한 사진과 이야기로 설명한 것은 물론 『어린 왕자』, 『야간 비행』 등 작품 해설과 뒷 얘기가 잘 정리돼 있다. 여기에 전시된 어린 왕자를 펜으로 그린 스케치, 소혹성에 앉은 어린 왕자에 채색까지 한 그림은 1946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원본이다. 세계에서도 몇 점 없는 작품이어서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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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띠 프랑스의 전시관 내부 |
쁘띠프랑스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8년 가을, 인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메인 촬영지가 되면서부터다. 강마에 작업실, 악단 연습실, 두루미(이지아)와 강건우(장근석)의 첫 키스 등 많은 신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지금도 강마에 작업실에는 드라마에서 연기자들이 만지고 앉았던 가구와 소품들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강마에가 봤던 악보도 그대로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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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은 자라섬의 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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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지역 음식은 별로 없는 대신 북한강을 끼고 있으니 당연히 매운탕이 발달했고 관광객이 상시 오가는 경춘가도에도 맛집들이 제법 된다. 쁘띠 프랑스가 있는 청평면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설악면 강변에 매운탕 집들이 몰려 있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8호(25.2.2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