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가오리회와 녹동항에서 만난 붕장어탕
겨울 음식이 가장 맛있는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고흥이라고 말하겠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는 삼치회, 입속에 쫀득하게 감기는 황가오리회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리고 아침 해장으로는 녹동항의 뜨끈한 붕장어탕 한 그릇 어떠하신지. 한 상 가득 반찬이 올라오는 백반도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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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동항 일몰 |
강진에서 ‘남도 음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맛보고 생각했다. ‘아, 나는 지금까지 헛것을 먹고 살았구나.’ 다시 태어난다면 꼭 전라도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뒤로 장흥과 목포, 여수 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당시 데스크가 “넌 왜 맨날 전라도만 가냐?”고 했는데, 거기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음식이 맛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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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갯벌에서 저녁거리를 캐는 아주머니 |
여행은, 정말 별거 아니다. 그 장엄하다는 이구아수 폭포와 피라미드 앞에서도 이십 분 정도 있으니 처음의 놀라운 감흥이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고 심드렁해지는 걸 직접 경험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일행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고 꼬드겼고, 일행은 내가 그래 주길 기다렸다는 듯 “그럴까요?” 하며 나보다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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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어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상인, (가운데)집집마다 피굴을 만들어 먹는다. (우)매생이 덖음 |
아무튼 맛있는 걸 먹겠다는 일념으로 남도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지난해 어떤 프로젝트 때문에 매달 전남 고흥을 방문하게 되면서 남도 음식의 또 다른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 섬진강을 사이에 뒀을 뿐인데 하동과 광양은 너무나 다르다. 말도, 음식도, 사람들의 성정도 너무나 다르다. 음식도 마찬가지. 딱 붙어 있는 강진과 장흥의 음식이 확연히 다르다. 목포와 여수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같은 장어를 재료로 장어탕을 끓여 내도 여수의 장어탕과 목포의 장어탕은 그 맛이 현저하게 다르다.
고흥은 오직 고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고흥에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남도 음식의 장면을 목격했다. 가장 인상 깊은 음식을 꼽으라면 열무김치다. “겨우 열무김치요?” 하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심이다. 열무김치는 고흥 사람들의 ‘소울 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고흥 사람들에게 외지에 나가 있으면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면 뭔지 물어볼 때마다, 열에 아홉은 열무김치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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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식 열무김치 |
그렇다면 고흥식 열무김치는 뭐가 다를까? 만들 때 풋고추와 밥을 갈아 넣는데, 그래서 상큼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난다. 입안에 질척하게 감기는 맛도 있다. 어떤 집은 달짝지근한 맛이 강하고 어떤 집은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하다. 스타일도 달라서 어떤 집은 국물을 자작하게 만들고, 어떤 집은 국물이 넉넉하다. 하지만 전부 맛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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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고흥에서 맛보는 굴구이 (아래)피굴 |
피굴은 고흥에서만 먹는 특이한 음식이다. 바로 옆에 위치한 장흥에서도, 가까운 강진에서도 먹지 않는다. ‘피’는 껍데기를 뜻한다. 굴을 껍데기째 끓이면 국물이 나오는데, 이때 속만 골라 내 따로 보관하고 이 국물을 냉장고에 넣어 차게 식힌다. 나중에 국물과 보관해 둔 굴을 넣고 김, 쪽파, 참깨 등을 양념으로 뿌려 먹는다. 개운하면서 시원한 맛으로 술꾼들이 해장 음식으로 즐겨 먹는다. 피굴 따로 파는 식당은 없고 백반집에 가면 반찬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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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동항 풍경 |
가성비 만점의 푸짐한 백반
아침은 녹동항 앞에 자리한 백반집에서 꼭 해결하시기를 추천한다. 수산물 위판장도 있고 건어물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는 녹동항은 고흥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70년대부터 번창했다고 한다. 포구에 서면 멀리 소록도로 가는 다리 소록대교가 보인다. 소록도를 건너면 거금대교를 넘어 거금도로 갈 수 있다. 아침 7시 정도에 경매가 열리는데 구경할 만하다.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지만 경매장답게 제법 시끌벅적하고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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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동항 앞의 백반집들 |
식당 벽에는 ‘백반 만 원’이라고 쓰인 메뉴판이 붙어 있다. 백반을 시키면 흰 밥이 가득 담긴 밥그릇과 바지락으로 끓인 국, 파래무침이며 어묵볶음, 갈치속젓, 신김치, 파김치, 시금치무침 등이 가득 담긴 쟁반이 식탁 위에 놓인다. 잘 구운 생선도 한 마리 놓여 있고 투박하게 부친 계란프라이가 올라간 접시도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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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 어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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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위에 삼치회 한 점을 올려 싸서 먹는다. |
일반인들에게 고흥을 대표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삼치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삼치회는 지금 딱 맛이 오를 때다. 삼치회를 먹으려면 나로도 여객터미널 근처로 가야 한다. 고흥 사람들도 삼치회를 먹기 위해 나로도항으로 간다. 삼치는 성질이 급해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죽기 때문에 신선한 삼치회는 나로도항이 아니면 먹을 수 없다.
나로도항은 예부터 삼치로 이름을 날린 포구로 일제강점기에는 삼치 파시(바다 위에 열리는 생선 시장)가 열릴 정도였다. 지금도 삼치 하면 나로도를 최고로 쳐준다. 삼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삼치 맛을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표현하는데 삼치 회 한 점을 맛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씹지 않고 혀만으로도 즐길 만큼 부드러운 것이 바로 삼치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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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참기름에 찍어 먹는 황가오리 애 (아래)쫄깃하고 고소한 황가오리회 |
그 다음엔 회를 한 점 먹을 차례. 붉은 반점이 촘촘하게 박혀있는데 그 모양이 꼭 소고기 차돌박이 같기도 하다. 식감은 찰지고 쫀득하다. 특히 날개 쪽은 씹는 맛이 일품이다. 깻잎장아찌에 밥 한 숟가락을 올리고 그 위에 황가오리회 한 점과 마늘 하나를 올리고 먹으면 ‘좋다!’라는 추임새가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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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에 전시된 나로호 |
아, 그러고 보니 너무 먹는 이야기만 한 것 같다. 고흥에는 돌아볼 곳도 많다. 삼치를 먹으러 나로도에 갔다면 외나로도에 위치한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에 가보자. 우리나라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산증인이다. ‘2009년 8월 19일 첫 발사 시도 카운트다운 중단, 8월 25일 첫 발사 이륙에는 성공했지만 과학기술위성 2호 궤도 진입 실패, 2010년 6월 9일 2차 발사 카운트다운 중단, 6월 10일 2차 발사 1단 로켓 폭발로 실패. 그리고 2013년 1월 30일 3차 발사 마침내 성공.’ 2009년 6월 12일 개관한 우주과학관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1, 2층으로 구성된 우주과학관에는 우주로 이동하기 위한 기본원리와 우주탐사, 로켓과 인공위성 등을 주제로 전시되어 있으며, 우주과학에 대해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가까운 남열리에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가 있다. 나로호 발사 모습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든 곳으로 7층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르면 고흥과 여수 사이의 바다에 떠 있는 여러 섬과 멀리 나로도의 장관이 펼쳐진다. 남열해변은 길이 800m의 고운 모래가 깔린 넓은 백사장을 자랑한다. 겨울이면 파도가 세찬 까닭에 서핑을 즐기려는 서퍼들도 전국에서 많이 찾아온다. 운이 좋으면 이들이 서핑하는 광경도 볼 수 있는데 그 풍경 앞에서 꼭 외국의 어느 해변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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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열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서퍼 |
매생이 하면 장흥을 떠올리지만 고흥도 장흥 못지않게 매생이로 유명하다. 고흥에서는 매생이를 ‘덖는다’라고 표현한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마늘과 생굴을 넣은 후 센불에 달달 덖어주다가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 매생이를 넣고 중약불로 불을 줄이고 잘 저어주며 보글보글 끓여 주면 완성이다. 국보다 훨씬 진하다. 젓가락을 꽂았을 때 젓가락이 서 있어야 제대로 된 매생이 덖음이다.
문어 코 구이라는 음식도 있다. 녹동항에 있는 신성식당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어 코를 파는 식당이다. 주문하고 기다리니 초벌구이를 해서 나왔다. 음, 언듯 보기엔 굳이 안 먹어 봐도 짐작이 되는 맛이었다. 그래도 왔으니 맛은 봐야지. 살짝 덜 익은 게 맛있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을 듣고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어 본다. 그 순간 감탄이 터져 나온다. “아니, 세상에 이런 맛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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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문어 코 구이 (아래)소록도로 가는 소록대교 |
고흥에 갈 때마다, 초입에 접어들면 습관적으로 창문을 내렸다. 영하 12도의 파주에서 출발했는데, 고흥에 도착하면 언제나 영상이었다. 그렇게 고흥을 다니며 ‘나중에 살고 싶은 곳의 목록’에 고흥이 추가됐다. 그것도 아주 윗자리에 말이다.
고흥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고흥으로 귀농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인천에서 영어 학원을 하다 오신 분도 있었고, 서울에서 큰 사업을 하다 정리하고 내려오신 분들도 있었다. 그분들께 왜 고흥을 선택하셨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딱 일주일만 있어 보면 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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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부터) 도라지식당의 황가오리회, 두툼한 살점이 맛있는 장어탕, 고흥 유자로 만든 음료 |
고흥에는 커피도 난다. 고흥에는 커피 원두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가 많다. 고흥읍과 녹동항 등에 고흥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고흥읍내에 자리한 ‘고흥을담다’는 여행자카페다. 고흥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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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고흥은 커피 생산지기도 하다. (우)고흥산 커피로 만든 에스프레소 |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0호(25.03.1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