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국밥과 비빔밥의 진국을 맛보다
좋은 삶을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라 믿고 있다. 친한 사람들과 함께 하루나 이틀 정도(일주일은 너무 길다. 싸울 수도 있다) 어딘가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꽃나무 아래 산책도 하고 나면 힘도 나고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경험상, 생을 긍정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단언컨대 여행이다(짧은!). 올봄에는 전북 익산으로 가보시라고 추천해 드린다. 미륵사지가 있는 그곳 맞다. 음식도 맛있고 가볍게 산책을 즐기기 좋은 곳도 많다. 옛 백제의 번성을 가늠할 수 있는 왕궁터도 있다. 여유롭고 한가롭고 느긋한 봄 여행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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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중앙총부 공회당 |
익산은 경주, 공주, 부여와 함께 특별법으로 우리나라 4대 고도로 지정되어 있다. 왕궁, 왕릉, 사찰, 산성이라는 고도의 4대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시도 제법 크다. 전북 도내에서 두 번째, 호남에서 네 번째다. 인구는 약 28만 명. 철도와 도로 교통도 좋아서 서울에서 KTX를 이용하면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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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미륵사지(위) 나바위성당 내부(아래) |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의 도시 익산
몇 해 전 지인들과 1박 2일 동안 전주와 익산을 답사한 적이 있다. 사실 답사는 핑계였고, 전주에 근무하는 지인 A를 따라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요량으로 떠난 길이었다. 우리는 A가 짜놓은 코스를 따라다니며 ‘성실하게’ 먹었다. 지인 중에 피순대 마니아가 있어 그의 안내로 피순대집에도 갔다. 선지 맛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길거리에 있는 가맥집에도 들렀다. 낮부터 조금씩 마시기 시작한 술이 저녁에는 어느덧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다음날에는 익산으로 넘어 갔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지인 중 한 명이 ‘아침은 죽어도 익산에서 먹어야 한다’고 미리 못박았기 때문이다. 전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그는 말했다. “무조건 콩나물국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가 말한 콩나물국밥집은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고, 콩나물국밥을 일행 모두가 좋아하는 데다, 미식가인 그의 강력한 주장이라 다음날 아침은 익산으로 가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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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해옥 콩나물국(위) 황등시장 비빔밥은 토렴을 하고 비벼서 나온다.(아래) |
“한때는 콩나물국밥에 빠져서는 전국의 콩나물국밥을 다 먹어보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지. 그런데 이 집 콩나물국밥을 먹어보곤 ‘아, 더 이상 딴 데는 안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콩나물국밥 집에 들어섰다. 메뉴는 콩나물국밥 딱 하나였다. 주방에 놓인 커다란 솥에는 육수가 펄펄 끓고 있었고 솥 앞에서 주인 아저씨가 국밥을 토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토렴 풍경이었다. 솥에는 멸치가 가득 든 커다란 망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멸치육수의 단내가 코 끝으로 훅 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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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렴해서 내는 일해옥 콩나물국밥 |
그리고 비빔밥. 익산에 간다면 비빔밥도 꼭 드셔보시길. 사실 내 입맛에는 전주비빔밥보다 더 맛있었다(입맛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까). 황등면의 황등비빔밥은 익산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한때 우시장까지 있었다던 황등시장은 위세를 잃었지만, 비빔밥은 여러 식당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황등비빔밥은 밥을 살짝 비벼 고기 국물에 토렴을 한 뒤 그릇을 데워 육회를 얹어 내는 게 특징이다. 거기에 선짓국을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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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산책을 즐기기 좋은 원불교중앙총부(좌) 봄산책을 즐기기 좋은 원불교중앙총부(우) |
익산의 봄, 봄, 봄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을 먹는 틈틈이 우리는 여행을 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원불교중앙총부. 익산의 봄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장소다. 3월 말이면 원불교중앙총부 곳곳에 벚꽃이 환하게 핀다. 익산 시내에 자리한 원불교중앙총부는 종교시설, 게다가 국내 4대 종교의 하나로 꼽히는 원불교의 본산이라 선뜻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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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중앙총부 |
원불교 중앙총부는 1924년 만들어졌다. 1924년 9월 익산총부를 건설하면서 최초로 지어진 본원실을 비롯해 1927년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처소로 지어진 금강원 등 8개 건물이 초창기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대종사의 거처로 지어진 금강원, 대종사뿐만 아니라 2대 정산 종사, 3대 대산 종사가 열반한 종법실, 집회소였던 공회당, 대종사의 집필장소였던 송대 등이 모두 일본식주택건축 영향을 받은 목조 구조의 개량 한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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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궁궐터의 벚꽃 |
백제의 번성을 상상하다
앞서 말했듯, 익산은 경주와 공주, 부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고도다. 고도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궁궐터가 있어야 한다. 익산 왕궁리는 백제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건립했다는 제석정사 터를 비롯해 그 안에 관궁사, 대궁사 등의 절터와 토성 터 등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이곳이 왕도였거나 왕도와 직접 관련이 있는 유적이라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의 문헌들도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 터’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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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궁리 오층석탑 |
익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여행지는 미륵사지다. 익산시 금마면 한가운데 솟은 미륵산 자락 아래에 자리한다. 폐사됐으니 엄밀히 말해 미륵사지다. 미륵사는 신라 황룡사와 고구려 금강사에 대응할 만큼 백제 대표 호국사찰로 꼽히는 절이며, 백제의 가장 거대한 석탑을 품은 옛 절터다. 신라 땅으로 가 섬섬옥수 선화 공주를 데려왔던 사내 무왕이 나라가 기울어 가는 시점에 지은 절이다. 시인 신동엽은 시 ‘금강’에서 미륵사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준다.
“어느 날 선화는 미륵산 아래를 산책하다 미륵불을 캤다. 땅에서 머리만 내놓은 미륵 부처님의 돌, 마동왕의 손가락 이끌고 다시 가 보았다. 안개. 비단 무지개, 백성들이 모여 합장, 묵념. 그들은 35년의 세월 머리에 돌 이고 염불 외며 농한기 3만 평의 땅에 미륵사, 미륵탑을 세웠다.”
독특한 정취의 근대문화 건축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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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바위성당에 한지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위) 나바위성당(아래) |
성당 안에도 초기 성당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부에는 공간을 가르는 8개의 목조 기둥이 있는데, 이는 남녀유별의 관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창도 이채롭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지의 수묵 그림을 댔다. 성당 분위기가 한층 그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바위성당에서 멀지 않은 성당면 두동리에는 1929년에 세워진 두동교회가 있다. 한옥으로 지어진 ‘ㄱ자’형 교회로 김제의 금산교회와 더불어 국내에 두 곳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지은 이유는 남녀 신도가 따로 앉아서 설교자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성당 앞 마당에는 나무로 쌓아 올린 종탑의 모습도 그대로 간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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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동교회(위) 두동교회 내부(아래) |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이 원고를 썼다. 스탠드 불빛 아래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으면 세상 끝에 선 듯한 기분이 든다. 쓸 단어가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써야 한다. 일단 ‘지금 나는’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한참 뒤 ‘어제 나는’이라고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젠 작가로 살아갈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조차도 모르겠다. 다만 날마다 뭐라도 써야 하는 인생이라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써나가다 보면, 언젠가 내게도 수상소감 같은 걸 말할 날이 오지 않을까. 물론 운이 좋다면 말이다. 글을 쓰는 사이 어느덧 아침이 되었고 나는 익산의 따뜻한 콩나물국밥을 떠올리고 있다. 다른 콩나물국밥과 경쟁하지 않고 궁극의 콩나물국밥으로 존재하던 그 맛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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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익옥수리조합 건물(위) 황등시장 비빔밥(아래) |
내가 찾은
[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2호(25.03.25) 기사입니다]